지금 되돌아 보건대, 재수를 포함해서 고교 3년 재수, 까지 약 4년동안 나는 고3과 맞먹는 생활을 했던것 같다. 고3을 4년이나 한 셈이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8시 30분에 학교 자습이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서 12시까지 공부를 하거나, 집앞에 있는 독서실에서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집에 들어가곤했다. (이렇게 공부하면 주간에는 졸음이 쏟아질수밖에 없다)
당시 나는 모의고사는 거의 350점 정도(400점 만점)를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어영역 90점(120점만점) 수리영역 80점(80점 만점) 외국어영역80점(80점만점) 수탐100점(120점만점) 정도였다. 영어는 중학교때부터 조금씩 해온 덕분에 1학년 모의고사는 어느정도 버틸수 있었을 것이다.
거의 저 점수에서 조금씩 서로 조정되면서 거의 350점대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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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것처럼 고등학교시절 3년동안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 가장 보람있고 재미있는 공부를 했다고 생각한다.
2학년때 나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로 두고 문과를 지망했고, 공부에 무언가 목적이 생기고 난 뒤부터, 나는 공부하는 이유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노력하는 과정이 끝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것이라는 아주 자명하고 쉬운 진리를 잊고, 나는 모의고사 따위의 잣대에 얽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보람이 없는 그런 패닉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고2, 고3 시절 공부의 절대량이 고1시절보다 많았을지 모르나 진정으로 열심히 공부한 것이 분명 아닐 것이라 여긴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에는 나의 영혼이 빠져있었으므로....
2학년이 되고 나서는 나는 거의 공부에만 몰두했다.
중학교때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줄곧 맡아오던 간부 생활도 고2땐 청산(?)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실장선거에서 낙방한것이지 (어쩔수없었음..) 내가 안하겠다고 해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학년 공부의 테마를 "공부의 즐거움을 깨닫다..." 라고 붙인다면
2학년 공부의 테마는 "무작정열심히.." 였다..
이 당시 나의 모의고사 성적을 보면 330, 340, 350 여기저기를 오갔다..
이 때 언어영역은 110점 이상을 맞았었고, 수학은 70점대 중반, 영어는 70점대 후반, 사탐은 거의 반타작하다시피 했다.. (120점 만점에 70점이었던 기억도 있다.) 이 당시 영어는 텝스공부를 주로했었다. 텝스공부를 수능 영어공부를 대신하여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는 수능시험에서 벗어난 것이라해도 크게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 많이 읽고 많이 외우고 많이 듣는 사람이 승리한다. 수학 공부는 1학년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정석 중심의 공부였다. 언어영역은 문학작품을 많이 알기 위한 공부를 했다. 2학년때 두산동아에서 나오는 참길문학(지금은 하이탑으로바뀌었다.) 자습서를 5번 정도 반복해서 보았던 기억이난다. 2학년때까지만해도 나는 국어 영어 수학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있었다. 인문계 총인원이 220명 정도 되었었는데, 인문계 최 상위권 친구놈들은 수리탐구2(사회과학)만 따라잡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학년때는 등교하는 시간부터 자습이 끝나는 시간까지 거의 입에 곰팡이가 쓸정도였다. 동고동락하는 친구들을 외면했다.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그러니 더더욱 공부에 보람도 없었고.. 계속 내가하는 공부에 나의 영혼은 없었다.
아, 학교에는 기숙사가 있었다. 기숙사라기보다는 심화반단체 합숙소 정도의 표현이 맞을듯 싶다. 인문계 자연계 거의 1:1 비율로 50명을 선발하여 2학년말부터 수능시험치기 전까지 학교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사실 학교는 장소만 제공하였을뿐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숙식비, 사감 월급 등등등..)은 모두 학생부담이었다. 월 40만원 상당..
이런 이유로, 2학년 겨울방학 공부는 기숙사에서 시작되었고, 당연히 초점은 수리탐구2영역(사회,과학)에 맞춰져 있었다. 고1때부터 그랬지만, 고2때까지도 나는 올빼미 족이었다. 올빼미족(무슨짓을하든 새벽까지 깨어 있는 무리). 거의 나는 새벽까지 공부를하다가 한 30분쯤 졸고는 3시쯤 잠자리에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상시간은 겨울방학중 보충수업이 있었던 관계로 7시였다. 4시간만 자고 낮에 버틸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잘 버텼던거 같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거르고 기숙사에서 자고 가는 일이 잦았고, 수업시간에도 조금(많이) 졸았다. 이때부터 나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나보다. 잠이 줄어들면 낮에 졸립고, 이 졸음을 참다보면 두통이 온다. 그래서 한달에 두,세번정도는 꼭 두통으로 보충수업을 일찍 끝내고 쉬어야했다. 겨울방학동안 주말에 사회,과학 학원을 다니면서, 나름대로 좀 실력이 쌓였다 싶을때, 겨울방학이 끝이나고 2학년이 끝이나고 봄방학이 끝이나고 3학년이 되었다...
그렇게 끝난 겨울방학.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노력한 대가는 사뭇 달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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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월 첫 모의고사에서 총점 371.3점(6차 마지막 해에 소수점 문제가 사라졌다. 따라서 나의 고등학교 3학년 생활 초기에는 소수점 자리 점수가 존재했었는데, 수능시험이 있기 몇개월 전에는 소수점 점수가 사라졌었다...)을 받았다. 이 때 나는 계열 2등 전국 665등을 했다. 언어영역 107.8점 수리영역 80점 외국어영역75점 수리탐구 2 영역 108.5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3월 첫 모의고사는 내가 자만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역시나 인문계열 최상위권 녀석들도, 내가 수리탐구2만 극복하니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자만. 3월이 지나고 4월, 5월까지 나의 자만은 하늘을 찔렀다. 이때도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냥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4월 5월 나는 자만했기에, 더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고 공부가 더 절실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어떻게 공부하건 열심히 하든 말든, 결과만 좋으면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5월 말 무렵이었다. 고려학평에서 본 모의고사였는데, 그 때 내 점수는 똑~ 떨어졌다. 370점대 380점때까지 넘나들던 모의고사 점수가 갑자기 350점 대로 추락했다. 그럼 다른 애들은? 나만 추락했다. 특히 언어영역에서 헤매기 시작했다. 2학년때는 110점 이하로 맞아본적이 없었고, 3학년 초에서 110점 내외의 성적을 유지했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90점대의 점수를 맞은 것이다. 아.. 젠장. 제기랄. 언어영역이 왜 이럴까. 이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하는 날까지 언어영역을 나를 위협하는 과목이었다. 난 그 때도 무엇을 잘못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엄청난 점수 등락 곡선을 그렸다. 마치 산봉우리와 계곡이 계속되는 험한 백두대간처럼, 들쑥날쑥한 곡선을 그리기시작했다.
수험생의 대부분이 모의고사를 공부방향의 지표로 삼는다. 나도마찬가지였다. 언어영역 점수가 불안해서, 계속해서 언어영역 문제지를 풀어댔고, 때로 어떤 모의고사에서 영어시험을 잘 못본 경우에는 또 다음 모의고사때까지 영어공부가 내 공부의 중점이 되었다. 이렇게 일관성 없는 공부, 계획성 없는 공부는 정말 고3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 같다.
더구나, 고3이 들어서 기숙사 학습분위기는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사감 선생님조차도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습시간을 지키는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정도였고, 마음대로 자습실을 들락날락했다. 학교 앞 오락실은 거의 정진실 학생들이 장악해갔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자연 휩쓸리게 되었고, 공부는 하면서도 보람을 느낄수 없는 상태. 이 지옥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특히, 나는 하루하루 계획 일주일 계획등 계획을 모두 세워두고 있었는데, 하루하루 그 계획 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수험생은 잠자리에 들기전에 '아 오늘도 어제처럼 열심히 했구나...'하는 뿌듯함, 보람을 느끼면서 잠을 자야한다. 그래야 피로도 해소되고 계속해서 기분좋게 공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잠자리에 들기전이면, '아 저걸 다 하고 자야하는데.. 오늘도 다못하다니.. 이런 망할 인간.." 하는 자책을 하였다.
더구나 주위사람들이 나에게 가지는 기대는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니가 하는 방법은 잘못되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니가 그정도는 해야지.. 니 점수가 그래서 되겠니... 그런 말들, 태도들이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다. 나는 그저 항상 자율적인 나이고 싶었다. 자주적이 나이고 싶었고, 내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하는 나이길 바랐다. 그러나 다들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최종 선택은 니가 하는 것이다..' 하면서도 나에게 구속아닌 구속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공부방법에 있어서도, 나의 심리적 안정감에 있어서도, 공부하는 환경에 있어서도, 수험생으로서 어떤것도 만족되지 않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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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때 나는 반에서 실장을 했다. 사실 처음에는 반에서 간부를 맡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반에서 실장을 했던 내 친구들도, 그렇게 큰 부담을 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담임의 성향에 따라 다른 문제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실장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존재였다.(고3담임선생님을 싫어한다거나 원망하는것은 절대 아니다...좋은분이셨다. 다만 고3시절동안 정신적 방황과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지 모를일이다..) 담임선생님의 신조는 고3이건 고2건 고1이건, 자기가 맡은 책임은 다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한 학급에서의 간부가 책임져야할 그 책임이 특정한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고3이라면 담임선생님께서 도와주실수 있는 일은 최대한 도와주는것이 학생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3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성격상 그런 분이 못되셨다. 나를 많이 위해주시기는 했지만, 그런 선생님의 성격은 나의 마음에 심한 부담으로 작용했다. 공부하는데 눈치봐야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늘 성적이 불안했고, 성적이 떨어질때마다 우리 담임의 눈치를 봐야했다. --
각설하고, 여름방학이 왔다. 고3에게 여름방학은 참으로 어려운 시기다. 일단 날씨가 덥고, 따라서 의욕이 떨어지기 쉽다. 공부하는 것이 짜증스럽게 여겨지는 날들도 있다. 나에게는 소위 말하는 슬럼프가 5월 이후 여름방학까지 계속되고있었다. 슬럼프가 지속되는 동안 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하루하루 계획을 꼬박꼬박 세웠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 무리한 계획을 달성해본 적이 없었고, 따라서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은 수능시험치는 날까지도 계속되었다.
더구나 당시 나는 머리를 빡빡 밀었다. 웃기지만, 삭발시위 같은게 아직도 존재하는걸 보면 여전히 삭발은 무언가 성취해내려는 의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했던 것은 순전히 사회화의 결과였겠지만, 그만큼 당시 나에겐 나 자신을 바로잡는게 크나큰 과제였고 부담이었기 때문에 삭발따위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이렇게 여름방학은 지나갔다. 여름 방학 뒤에는 9월 평가원 모의고사가 있다. 사람들은 6월 평가원 시험과 9월 평가원 시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사실 다른 쓰레기 모의고사와 달리, 평가원 시험은 수능 시험에는 못 미치지만 매우 괜찮은 문제를 낸다. 거의 수능시험에 가까운 공신력있는 문제라는 소리다. 그래서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모의고사일 뿐이고 평가원 시험으로 대학을 가는 것은 아니기에, 너무 그 결과에 연연하지 말길 바란다. 결과가 좋은 사람은 자만하지 않도록, 결과가 나쁜 사람은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할 일이다. 나는 이 9월 평가원 시험에서 335점(400점 만점)을 맞았다. 충격적이었다. 나의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나는 그 좌절의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사람들은 나에게 위로를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실망을 하였다. 그것들 또한 나를 더 방황하게 한 요인일지 모른다.
9월 평가원 시험을 뒤로 참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곧 11월 6일 수능 시험 날이 불쑥 다가왔다. 수능 시험을 보기 하루 전날, 수험생들은 모두 간만에 주어지는 그 널널한 시간을 긴장과 외로움 속에 보냈을 것이다. 밤늦게 까지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떨어져, 이제는 홀로 시험을 치르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공허하다고 해야할지.. 어떤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시험 날이 다가갈수록 수험생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까지도 휴일이면 어김없이 학교 도서관을 찾아들었다. 내가 왜 친구들 많은 이곳까지 오느냐, 여기가 오히려 더 공부가 잘 안되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다들 혼자 공부하는 것이 외롭다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공부만 생각하면 처참하고 짜증날 수 있으나 그래도 고3시절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경험인거 같다. 나도 고3시절 힘들었던 만큼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잊을 수 없다.)
수능 시험 당일 아침, 늘 불안하고 초조해한 나.. 무모하긴 했지만 제대로 실천해보지 못한 계획들을 떠올렸다... 아쉬운 것들을 애써 잊어가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시험을 잘 치르겠다고 내 계획장에 적어두고 길을 나섰다. 내가 시험본 학교가 집과 가까웠던 관계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기억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열심히 했다는 생각은 들지않았다. 지금 내가 치러야할 시험이, 그 미래가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어떻게 시험을 치렀는지 그날 하루가 휑~ 하니 지나가버렸다. 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길에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끝났다는 홀가분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착찹할 다름이었다. 시험을 다 매기고 나니 내 점수는 339점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께 결과를 말씀드렸다.. 한숨을 쉬셨다. 그 한숨.. 그 안타까움이 서려있는 그 한숨은 내 마음을 내리 찧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정도 밖에 할 수 없는 내가 미웠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나는 혼자서 고등학교 운동장에 나갔다. 눈물이 났다. 답답했다. 할아버지께서도 실망이 크셨을 것이다. 그만큼 기대가 크셨으므로.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건 나뿐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 모두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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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단 한번에 평가되어야만 하는 수능 시험이 가혹하기 그지없다. 누구는 찍발 터져서 시험을 잘 볼수도 있고, 누구는 마킹하나 잘못해서 1점차로 대학에 떨어지기도 하고, 누구는 몸이 아파서 시험을 아예 망치는 경우도 있다.
내 경험 상, 수험생은 이런 불안감을 누구나 가지게 마련이지만, 이런 걱정은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다.잘 찍어서 시험 잘볼수도... 하는 기대감 역시 쓸데없는 기대에 불과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걱정 중에 60%이상이 전혀 실현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들었다. 걱정하지마시라~ 수능 성적이 딱 자신의 실력이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래서 원래는 잘했는데, 시험을 망쳤다, 원래는 못했는데 시험을 잘 쳤다 이렇게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한다. 수능을 처음보는 사람이 자신이 받은 성적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거나, 성적보다 못한 실력을 가졌다는건 어불성설이다..
수능시험 다음날, 웃기지만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나왔다..ㅎㅎ 눈물 젖은 라면을 먹었다..-- 사실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 틈엔 나보다 시험을 못본 학생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 친구들이 눈물 흘리는 내 모습에 어떤 생각을 했을지 참...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더 철없고 생각없는 인간이었던거다.
11월 6일 수능 시험 다음날 방과후, 나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자포자기심정으로...
근데 그때 덜커억~ 문자가 왔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수시 1차 합격자 발표. 축하합니다.' 순간 내 머리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너무 당황스러워 무슨 일이 터졌는지 이해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언놈이 장난질이야? 성질나죽겠는데....'
그러고 보니 9월달에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수시모집에 지원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오...
2004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서울대학교 경영대 수시모집 인원은 200명중 60명이었고 1단계에서 120명을 뽑는다. 2단계에서는 2:1의 경쟁을 이겨내야하는 것이다.. 한명만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나게 공부를 했다. 시사문제를 검토하면서, 나름대로는 성의껏 준비했다. 그때 수시 스터디팀이 4명이었는데, 법대 1차 합격생 2명과 나를포함 경영대 합격생 2명(경영대 1차 합격생인 이녀석은 내 고등학교 동기놈이었다. 이하 '동기놈')이었다. 11월 7일부터 시작해서 시험이 있는 23일까지 우리의 공부는 계속되었다. (그때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무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오전 조였고, 동기놈는 오후 조였다. 동기놈은 23일 아침 시험장까지 나를 데려다 줬다 착하게도. 나는 대기실에서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너무나도 떨고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바로 재수행'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시험장에는 세명의 교수와 면접생 한명이 앉을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있었다. 내가 면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명의 교수가 무뚝뚝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온대로 대뜸 '훌륭한 경영자가 되고 싶습니다. 잘부탁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렇게 면접은 시작되었고, 대기시간동안 문제가 너무 어려워 잘 풀어보지도 못한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떨다가 20분간의 시험을 마쳤다. 나오면서 나는 낙방을 예감했다. 태어나서 그런 횡설수설은 처음했다...
12월 2일 수능 성적 발표와함께 수시 모집 결과도 발표가 났다. 스터디한 4명중에 동기놈과 법대를 지원한 1명은 합격하고 나와 나머지 한명은 떨어졌다. 예상대로의 결과가 나온 탓이었는지 나는 담담했지만....--
영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건 나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할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수능 성적은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 11점 올라서 350점이 나왔다. 친구들이 욕을 해댔다.--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가기엔 너무 턱없이 모자란 점수였다. 나는 담담히 재수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때 나는 가족들과 마찰이 있었다. 아버지는 실리를 따르라시며, 시립대 세무학과에 지원해서 가라고 말씀하신다.' 최종 선택권은 너한테 있다. 아버진 조언만 할 뿐이다...'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최종선택권은 나한테 있었지만, 거의 강제아닌 강제에 짜증이 날 따름이었다. 나는 그때 정말 바보였던거 같다. 나는 내 주장대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채 결국 집안의 강제에 따라 대학원서를 썼다. 내가 진정으로 내 인생의 개척자였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당하게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원서를 쓰고 당당하게 재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주눅들대로 주눅들어있었고, 자신감을 잃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때일이 떠올라 너무도 답답하다.) 나는 결국 아버지가 말하는 그 '실리'를 찾겠다고 동국대학교 경찰행정과 서울시립대 세무학과에 원서를 썼다.
그렇게 원서를 쓰고, 한참동안이나 나는 격변기를 거쳤다. 내가 내가 아닌듯한 느낌,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닌 듯한 느낌에 한참이나 앓고 또 앓았다. 아.. 내가 내가 되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대학 입시 결과가 발표되기전 나는 결정을 내렸다. 인생의 주인은 나이고, 지금까지 내가 결정한 선택은 전부 내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주변인으로서 바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나는 내가 되기 위해 무슨일이있어도, 한해 더 공부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의 꿈을 실속없고 허황된 것이라고 매도한 사람들에게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행동은 빠르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그길로 인터넷에서 바로 7차교육과정의 참고서를 샀다. 한해 늦어진다는 생각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제서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내가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행복감만 젖어들 뿐이었다.
내가 그때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패배자이고 타인에 의해 결정된 모습으로 나는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역시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때 나에게 그런 기회주의적인 결정을 내리게 했던 아버지의 결정은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 아버지는 그때 분명 재수라는 것이 1년을 늦어지게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점수에 맞게 최대한 전망이 좋은 학교, 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기성세대이고, 나는 기성세대의 안정 지향적 삶에 반대한다.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이미 많은 세월 겪어온 고생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것보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것을 원하는 그들이다. 내가 세무학과에 입학해서 그길을 걸었더라면, 세무 공무원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 받았을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삶, 참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도전적이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 일이 배제되었다면, 오늘날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주영씨가 안정적인 삶을 지향했더라면 지금의 현대그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 실현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반성해야할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기성세대처럼 고단한 세상에 역정을 느껴 기성세대의 주장에 타협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20년이라는 세월동안 세뇌되어온 가르침에, 나는 안정성과 많이 타협해왔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기성세대의 말을 따르는 것, 그것은 아무런 손해도 되지 않는다. 그냥 그저 평범하게 남부럽지않게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말을 따르는 것, 손해를 보지 않는 만큼, 크게 잘되는 경우도 없다... '해되는 것은 없지만 크게 덕되는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좀더 투쟁적인 일을 원한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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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나의 본격적인 재수생활이 시작되었다. 대략 2004년 1월이었다.
어쩌면 좀 도박이다 싶었다. 나는 6차 교육과정의 마지막 세대였고 따라서 재수는 7차 교육과정의 입시제도 절차를 따라야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해 6차교육과정이 고정 이었다면, 7차 교육과정은 선택으로 표현할 수 있을것 같다. 6차에서는 선택과목은 공통사회 +선택 사탐 이나 공통과학 + 선택 과탐 이었다. 그리고 모든 성적은 원점수로 판별기준이 되었다. 변환표준점수라는 게 있었지만,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원점수였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에서는 자기가 가려는 대학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실상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국,영,수에 사탐 또는 과탐 4과목을 모두 선택하였지만, 사탐이나 과탐의 경우 사탐은 11과목중 4과목 과탐은 8과목은 4과목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선택과목이 일치하는 학생은 거의 드물었다. (11C4 , 8C4 의 경우의 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득점 판별기준도 원점수가 아니라 표준점수로 하였기때문에, 각 과목마다 평균점수가 얼마이고 점수 분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같은 원점수의 표준점수는 천차만별이 될 수도 있다.
단적이 예로 2005 대입 수능에서 한국지리와 윤리는 50점 만점을 받아도, 표준점수는 61점이었지만 사회문화의 경우에는 3점짜리 두개를 틀리고도 표준점수가 62점이었다.
여하튼 이런 우려를 뒤로하고 일단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 이었다. 나는 책을 사서 줄곧 시립도서관에 갔다. 중학교때부터 친구랑 공부하러 다녔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재수할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먼저 나는 지난 수능 나의 패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고3 시절 모의고사 점수 편차가 천차만별이었다. 어떨때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다가도 어떨때는 매우 낮은 점수를 받기도 하였다. 자연히 불안해지고 불안해져서 공부도 더 안되고 모의고사 성적은 더 떨어지는 ..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었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니, 내가 기초가 부족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기초가 튼튼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이 자명하고도 간단한 진리를 그동안 잊고 공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이라..기본이라.. 기초를 어떻게 튼튼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나는 당연히 기본서를 봐야겠다고 생각이 굳어졌다. 그런 결론을 내린 후, 언어영역은 객관적인 시각. 수리영역은 수학의 정석, 외국어영역은 성문종합.. 사회탐구는 교과서.. 를 중심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성문종합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이었다. 성문종합영어는 1 단원을 숙독하는 데에만 거의 4시간 가량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힘들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끝까지 독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했다.. 그결과 2월 말에는 한번을 숙독할 수 있었고, 5월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을 봤다. 물론 처음볼때는 세세한 문법사항까지 다 공부를 했었는데 두번째 볼 때 부터는 거의 독해 위주로 공부를 했다..
아 그리고 이때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YBM 어학원 토익 강좌를 수강신청했다.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이 강의를 수강하러 갈 때마다, 1년 내내 이렇게 부지런하게 규칙적으로 생활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렇게.. 나의 1월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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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쯤 나는 재수학원을 등록했다.
1년동안 혼자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무언가를 배우러 가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생활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수험생들에게 규칙적인 생활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생활패턴이 완전히 익숙해지기까지 약 100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수능시험에 딱 익숙해진 생활 습관은 알게모르게 매우 크게 작용할 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여튼, 이런 이유로 재수학원을 등록했다. 2월 중순부터 시작된 학원생활은 3월에 있는 첫 모의고사 시험까지의 기간동안은 다들 매우 조용하고 엄숙하게 공부했다. 나 또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선택해서 온, 재수의 길, 처음으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한해를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정말 죽을만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휴식이 허용되는 자투리 시간까지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공부했다.
나는 매일 아침 거의 제일 먼저 학원으로 갔다. 6시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학원까지 걸어가면, 7시쯤엔 학원에 도착하게 되어있다. 고3수능 시험 전후로 해서 대구 병무청에 근무하시던 어머니께서, 대전 병무청으로 전근가셨기 때문에, 아침식사는 집에서 내가 차려먹고 점심 저녁은 학원 급식을 먹었다. 6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밥을 먹을때면 새삼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내가 감내해야할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의지를 다졌다. 이렇게 일찍 학원에 나가면 아무도 없는 아침시간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고 있는 수험생은 나뿐일것 같은 느낌에 보람차기도 했다.
이때엔 밥먹는 그 순간 배고프지 않을 정도만 먹으려고 애썼다. 배가 부르면 잠이 쏟아지고, 수업시간뿐만아니라 자습시간까지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남들과 비슷한 시간을 공부해도 최대한 많은 효율과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제였다. 그래서 나는 4교시가 끝난 후,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지 않고 15분 정도 공부를 하고 나서, 제일 늦게 밥을 받았다. 제일 늦게 받으면 별 반찬 없이 먹어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이 식사의 목표인 이상 그런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밥 받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일 늦게 밥을 받아서 나는 제일 일찍 밥을 먹었다. 입에 밥을 쏟아넣듯이 했지만, 언젠가는 이렇게 밥을 삼키듯이 먹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여기며 위로했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밥먹는 시간을 제외한 점심시간의 약 40분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점심시간은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주로 영어듣기 공부를 했다.
아 여기서 수험생이 주의할 점이 있다. 공부를 할 때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지금 모르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수능시험장에서는 알아야한다. 따라서 지금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자책할 일도 아닌 것이다. 저 아이가 아는데, 나는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말길 바란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지금 알면 그만이다. 시험장에 가기 전에 내가 모르는 것을 발견한다는 건 얼마나 기쁜일인지 모른다.
공부를 할 때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노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학생들을 보면, 남이 보기에 열심히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몇몇 학생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를 한다. '저 아이는 노력하는 학생이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 공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목적은 실력향상을 위한 것이지 남의 시선이 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행여 이글을 보면서 '나도 이런부류구나'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고치려고 노력하길 바란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면 100% 노력을 발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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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중순부터 3월까지 이 생활을 유지했다.
아침 6시 기상, 샤워 후 간단한 아침식사, 7시 도착 공부시작, 밤 11시 30분까지 자습, 집에 걸어와서 씻고 12시 전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기본서 중심의 공부는 계속되었다. 공통수학(7차에서는 일부가 수1로 포함되면서 수학 10가나로 바뀌었다.)책은 거의 너덜너덜해질 지경이되었고, 새로 산 수1 정석책도 두어번은 독파한 상태였다. 성문종합영어를 계속 꾸준히 공부했고, 언어영역은 오답노트를 만들어가며 내 생각의 틀을 깨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사회 탐구는 보통 연 초에는 비중을 두지 않다가 갈수록 비중을 크게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처음부터 사회탐구와 언어,수리,외국어의 비중을 비슷하게 했다. 사회탐구 또한 교과서를 꾸준히 읽었다.
수업시간에는 내가 공부한 내용과 다른 내용이 있으면, 재빨리 확인해보고 수업 내용을 그 시간내에 다 공부하려고 애썼다. 선생님이 말하는 내용을 음미하면서, 선생님이 농담을 하거나 수업 외적인 이야기를 할때에 잘 기억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고 외우기도 했다. 수학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선생님을 괴롭혔다. '하나를 해도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어떤 문제며 내용도 단순히 지나간 적이 없었다.
이렇게 3월 말이 되고 첫 모의고사를 봤다. 첫 모의고사는 대체로 어렵게 출제된다. 고3 시절에도 재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보통의 재수생과 고3들은 첫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게 마련이다. 나는 이 시험에서 450점 정도를 받았다..나는 이 성적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석이라는 것을 해봤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 1등을 했다. 특히 이때 수학이 100점이었는데, 당시 수학이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기 때문에 수학의 표준점수는 193점이었다....
내가 1등을 하다니... 나는 고3시절의 내가 모의고사에 연연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그 판단을 잊은채 점점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소위말하는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2월중순부터 3월까지 이 생활을 유지했다.
아침 6시 기상, 샤워 후 간단한 아침식사, 7시 도착 공부시작, 밤 11시 30분까지 자습, 집에 걸어와서 씻고 12시 전후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기본서 중심의 공부는 계속되었다. 공통수학(7차에서는 일부가 수1로 포함되면서 수학 10가나로 바뀌었다.)책은 거의 너덜너덜해질 지경이되었고, 새로 산 수1 정석책도 두어번은 독파한 상태였다. 성문종합영어를 계속 꾸준히 공부했고, 언어영역은 오답노트를 만들어가며 내 생각의 틀을 깨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사회 탐구는 보통 연 초에는 비중을 두지 않다가 갈수록 비중을 크게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처음부터 사회탐구와 언어,수리,외국어의 비중을 비슷하게 했다. 사회탐구 또한 교과서를 꾸준히 읽었다.
수업시간에는 내가 공부한 내용과 다른 내용이 있으면, 재빨리 확인해보고 수업 내용을 그 시간내에 다 공부하려고 애썼다. 선생님이 말하는 내용을 음미하면서, 선생님이 농담을 하거나 수업 외적인 이야기를 할때에 잘 기억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살펴보고 외우기도 했다. 수학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선생님을 괴롭혔다. '하나를 해도 확실히 하자...'는 생각에 어떤 문제며 내용도 단순히 지나간 적이 없었다.
이렇게 3월 말이 되고 첫 모의고사를 봤다. 첫 모의고사는 대체로 어렵게 출제된다. 고3 시절에도 재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보통의 재수생과 고3들은 첫 모의고사 성적이 좋지 않게 마련이다. 나는 이 시험에서 450점 정도를 받았다..나는 이 성적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석이라는 것을 해봤다.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 1등을 했다. 특히 이때 수학이 100점이었는데, 당시 수학이 매우 어렵게 출제되었기 때문에 수학의 표준점수는 193점이었다....
내가 1등을 하다니... 나는 고3시절의 내가 모의고사에 연연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그 판단을 잊은채 점점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에게도 소위말하는 슬럼프가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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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황기와 함께, 나는 재수의 경험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고 있었다. 시작부터 그러했지만, 재수는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소위 슬럼프 속에서 나는 처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된 시기를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설픈 노력과 어설픈 의지로 점철된 어설픈 자아. 타인의 눈에 비친 무기력한 나. 이런 나에게서 불가능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어설픈 자아밖에 모르는 나 자신을 위해서, 내 잠재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내 존재의 본질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의지'라 규정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하루하루 살자고 다짐했다. 결과를 떠나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누구보다 노력하는 과정에 충실하고자 다짐했다. 시간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승리자가 되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다. 하루하루 눈을 뜨고, 숨을 쉬고, 공부를 하고, 잠자리에 들 때, 늘 지금 이시간은 내 존재의 본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노력했다. (그때부터 '승리쟁이'라는 별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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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04
나의 실존은 다짐만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의지는 어느 곳으로 간 것인가.
언제쯤이면 나의 이성과 나의 정신이 나의 욕망과 나의 육체를 압도할 날이 오는가.
정신력으로 오늘 하루 나 자신을 이겨보겠다던 나의 다짐..
하지만 나는 다시 나약한 내가 되어 하루를 반성한다.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에, 쓸쓸하다는 핑계에 이 반성마저도 합리화한다.
나는 진정으로 노력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무언가를 위해 단 하루도 치열하게 살았던 적은 없었다.
이런 나지만 이제는 나의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투쟁을 한다.
누군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나도 할 수 있음은 물론 그것을 초월할 수도 있다.
결과를 떠나..
일단 노력하는 데에 최고가 되자.
지금 나의 실력과 나의 위치 모두 잊고
처음부터 시작하듯이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내 자아와의 싸움에서 배수진을 치자.
지금 내가 이기지 못하면 지금 내가 나에게서 뒷걸음질 치면
나는 평생 지금처럼 바보로 살아야 한다.
조금씩 내 자아를 정복하여 나의 실존의 의미를 증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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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내 일기장에는 이런 내용들이 무수히 적혀 있다.
그러나 이런 다짐만 있다고 해서 슬럼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늘 하루 종일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고, 저녁이면 나약한 내가 되어 집으로 초라히 쫓겨오곤 했다. 마음이 나약해지려 할 때마다 나는 윤동주 시를 읽었다. 젊은 날, 자신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깨끗한 영혼. 그를 본받으려 했다. 바보같이 안주하려고만 하는 부끄러운 자아를 채찍질하는 내 모습에 윤동주의 자아를 투영시키려고 했다... 이 시절 내 일기장에는 윤동주의 시가 많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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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04 목요일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4. 27. 04 화요일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돋아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윤동주, 별헤는 밤 중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
오늘 이 노력과 투쟁과 고통이 훗날 나의 봄이 될 것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우고 이기자.
언젠가는 밥을 먹을 때, 물을 마시듯 밥을 틀어마시지 않아도 되고
찬없는 맨밥을 삼키지 않아도 될 날이 반드시 온다.
나는 내 안의 괴물 그 녀석을 조금씩 쓰러뜨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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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한 달간을 방황했다. 마치 고3때 내가 느꼈던 느낌들처럼.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때 너무도 무리한 계획을 세우고 나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었다.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매일 큰 계획을 '18시간 공부, 4시간 수면..'으로 세워놓고 세부 계획을 짰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이 아닐 수 없다. 충분한 휴식이 있어야,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는 그것을 몰랐었던 것 같다. 하루는 18시간 공부를 하고 4시간 수면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늘 지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는 꾸준히 반복적으로 해야 가장 효과가 크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공부량이 많다고 해서 휴식시간을 줄여버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만다. 단기간 승부가 아니라 장기간 승부이다. 차근차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날엔가 나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무모한 계획은 일을 망쳐놓는다는 사실과, 내 자신에 대한 채찍질만이 공부의 왕도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슬럼프라는 것은 나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 계획이 제대로 달성되지 않을 때.. 스스로 슬럼프인가보구나...하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킬 명분을 만들어낸다. 마음을 다잡지 못한 나 자신에 그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종합해보면, 집중이 안되고 공부를 열심히 함에도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내가 스스로 규정해버리는 소위 슬럼프라는 것.. 이것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지 못해서 생긴다고 본다. 어느 틈엔가 나는 이를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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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04 월요일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았다. 오랜만이다. 희열을 느낀다.
호탕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자.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내가, 지금 이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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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하기 바란다. 혹시나 나는 잘 못하지 않을까 하는 불신이 생긴다면, 과감히 떨쳐버려라. 지금까지 열심히 해 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실력만큼 시험을 볼 수 있다. 시간이 촉박해지고 마음이 초조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당신의 실력향상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용기를 가지고 지금까지 해온대로 열심히 하길 바란다.
용기 있는 자는 나쁜 미래가 다가 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는다.
진정 용기 있는 자는 자신의 미래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해낸다.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재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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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命의 書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 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 을 쪼이리라.
그렇게 5월과 6월을 보냈다. 크게 기복없고 나름 보람된 시간들이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지식을 조금씩 쌓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식이 쌓이는 만큼, 나의 꿈과 희망의 그릇에도 나의 보람이 조금씩 쌓여 알차게 여물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고3 이맘때엔 느끼지 못했던 희열이, 지금 나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6월 중순이 넘어가던 어느 날, 나는 새로운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늘 따뜻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 좀더 나를 괴롭히고 견디고 싶었다. 유치환의 '생명의 서'에 나오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떠날 결심을 했다. 대구 촌구석에서 벗어나, 서울로 가보자. 뛰어난 녀석들이 더 많을 것이다. 우물안의 개구리로 살지말자.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지만, 이 때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었다. 어차피 수능시험을 보고 대학입시를 치르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경쟁자와 경쟁해야 할텐데, 나는 미리 더 우수한 녀석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더 단련하고 싶었다.
이미 나는 재수의 길을 선택하여 삼부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 부담이 크지만, 이 시기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올해를 끝으로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안겨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과감히 서울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하여 2004년 6월이 저물어가던 주말, 나는 짐을 싸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강북 종로학원에 등록을 했다. 강북 종로학원이 위치한 서울역 뒤편은 매우 낙후된 곳이었다. 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듯, 고가 도로 밑에는 노숙자가 넘쳐났고, 슬레이트 지붕을 한 주택가가 쉽사리 눈에 띄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가장 좋은 고시원에 들어가서 창밖에 보이는 풍경과는 다른 생활을 했다. 고시원 내방문은 번호를 눌러 들어가는 철문이었고, 방안에는 에어컨은 물론, 침대와 책상, 심지어 화장실까지 갖추어져있었다. 고시원 식당은 뷔페식이었고, 학생들이 공부하기 편리하도록 고시원 자체 독서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늘 간직해오던 마음이지만,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튼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홀로서기였다.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고, 완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했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모두 내가 선택한 일이었기에, 오히려 더 벅차고 흥분되었다. 첫날 나는 새로운 반에서 새로운 녀석들을 만나고 새로운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고 익숙해져갔다.
종로학원은 시험을 쳐서 학생을 선발한다. 그래서 대부분 학생들이 어느정도 실력을 갖춘 학생들이었고, 확실히 대구에서 다니던 학원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수도권 할 것없이 수많은 이들이 종로학원에 들어오려고 혈안이 되어있다는데, 대구에서도 한 구석에 위치한 그 학원과는 다를 수밖에. 내가 종로학원을 갈 무렵 즈음에, 반수를 하는 대학생들이 종로학원을 많이 찾았다. 연세대 고려대, 심지어 서울대 생까지도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 종로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의 문턱을 한번도 발딛어 본 일 없었기에, 이런 사람들이 조금은 부럽고,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학원 강사들이 100%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는 서울대 출신 강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100%라고 하니;;; 하긴 이곳은 서울이니까...
이때도 나는 6시에 기상하고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18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최대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고자 노력했다. 강북종로학원이 고시원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6시에 기상하고도 샤워하고 밥을 먹고 학원으로 출발하면 6시 45분쯤에는 학원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불을 켜고 들어가는 일은 하루종일 나를 뿌듯하게했다. 누구보다 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기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내가 가장 일찍 눈을 뜨고 학원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책을 펴들고 공부를 시작한 듯했다. 이런 느낌에 나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도 단어를 외우거나 배운 내용 중 모자라는 부분을 공부했다. 점심시간은 영어듣기를 하고 6교시 수업이 끝나면, 고시원 독서실에 와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 하루에 순공부시간으로(수업시간 포함하여) 15시간은 공부할 수 있었다.
수험생들에게 이런 생활이 대단해보이거나 힘들어보일 수도 있다. 지금의 나도 이리 생활하라고 하면 하루 공부하면 몸살이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시절 저토록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습관'이 아닌가 한다. 일전에 몸이 생활패턴에 적응하는 데는 100일이 걸린다고 이야기한적 있다. 지금 당장은 못할 것 같은 생활이 습관이 되면 피로를 이겨내고 아무렇지 않은듯 생활할 수 있다.
다들 늦잠을 자거나, 하루의 시작을 책이 아닌 인터넷이나 TV따위와 함께한 적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은 꼭 공부가 잘 안되고,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반드시 '공부하는' 하루는 아침의 맑은 공기와 책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을 빌어 조언하고자 하는 것은, 이처럼 부지런한 생활을 '습관'을 만들라는 것과, 하루의 시작을 제대로 시작해야 하루종일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다는 것. 두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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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대구보다 훨씬 먹거리, 볼거리도 많았다. 나는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는 일요일에는 쉬었다. 늦잠도 자고, 연극도 보고, 영화도 봤다. 인사동 거리에도 가보고, 창덕궁, 경복궁 뿐만아니라, 유명한 먹거리는 다 찾아가보았다. 무교동 낙지와 신당동떡볶이가 생각난다. 신당동 떡볶이는 기대보다 맛없더라. 무교동 낙지는 너무너무 맵더군. -0-. 이 때 본 연극 중에 '휴먼코미디'가 참 재미있었다. 늘 반복되는 일상에 신선한 웃음..
이렇게 하루의 휴식은 수험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고, 또 새로운 일주일을 열심히 보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365일 공부만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할 것이다. 머리도 하루는 쉬면서 스스로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주말을 너무 무리해서는 안된다. 한번은 일요일에 농구를 한 적 있었는데, 몸이 너무 힘들어서 월요일날 하루종일 졸았던 기억이 난다. 수험생인 분들은 분명히 '노는 것'과 '쉬는 것'을 구별해야겠다. 공부할 힘을 놀면서 허비할 순 없으니, 멀리 가지 않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괜찮은 것 같다. 그리고 주말 저녁엔 월요일부터 공부하기 위한 워밍업을 하길 바란다. 월요일 아침 갑자기 책을 펴면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테니, 일요일 밤에 그냥 침대에 누워서 혹은 소파에 앉아서, 국사책을 슥 읽어본다든가, 영어 독해를 몇개 해본다든가.. 이런 생활이 반복되고 쌓이면 분명히 진정한 '수험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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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강의는 어느 곳이나 그렇듯, 어떤 과목은 괜찮고, 어떤 과목은 기대이하였다. 학벌이 좋은 강사라고 해서 반드시 강의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전달능력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수업의 질도 달라진다. 하지만 질문대응력은 대체로 종로학원 강사들이 나았던 것 같다.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질문 노트를 만들었다.의문나는 사항을 머리속에만 담아두었다가 물어보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곤 했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예 질문 노트를 따로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복습하거나 혼자 공부하면서 의문나는 사항을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모조리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그리고 어려운 내용들은 알기 쉽게 요약하여 질문 밑에다 적어두었다. 질문 노트는 특히 사회탐구 영역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수학은 직접 기본서나, 문제지를 들이밀면 되지만, 국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으니. 역사공부는 교과서를 많이 들여다 보아도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서술된 사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킬 때, 나는 질문 노트를 많이 활용했다. 최대한 강사를 활용(?)할 수 있는 한 방안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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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종로학원에서 첫모의고사를 치렀다. 그리고 첫모의고사에서 1등을 했다. 그리고 대구를 떠나기전 치른 모의고사에서도 학원 1등을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재수를 결심하고 공부를 해오면서 모의고사는 내 실력이 아니라 여겨왔다. 내 실력을 평가할 수 있는 시험은 오직 수능시험 뿐이라고, 그래서 대박이니 쪽박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된 말이라 여겨온 나였다. 하지만, 모의고사가 성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수험생과 마찬가지로 컸을 것이다. 나는 대구를 떠날 때 품었던 '독한 회의'를 잊고 또다시 나태함에 젖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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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찾아온 나태함에서 나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늘 책을 붙잡고 앉아있는데도 머리는 잡념으로 가득차있었다. 그리고 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외출도 잦아졌다. 이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 나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늘 이성대로만 움직이고자 다짐했건만, 나의 몸은 육감에 젖어 편안하고 게으른 것만 찾으려했다. 그럴수록 나는 나를 더 채찍질하고 못살게 굴었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몇 주 정도 그러했던 것 같다. 수험생에게 있어 2~3주는 매우 크다. 1시간을 놀면 3시간 그 여파가 미치고, 3시간을 놀면 하루를 망치고, 하루를 놀면 이 여운이 일주일이 간다. 일주일 연짱으로 놀면 그 파급효과는 세달에 버금가며, 한달을 놀면 일년의 수험생활을 망치는 꼴이 된다. 지식은 쌓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붙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졌던 것도 금세 빠져나간다. 남들이 일주일 열심히 공부하고 내가 일주일 열심히 놀았다면, 그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자신이 너무도 답답하고 측은하여 정처없이 고시원을 나갔다. 인근 공원을 돌아다니고 가까이 있는 남대문 시장도 가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리고 무언가 이런 나태한 나를 소멸시킬 만한 것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던 중, 서울역 지하보도를 지나는 데에 지하보도 귀퉁이에 박스를 둘러치고 앉아 있는 노숙자 무리를 발견했다. 4인 가족이었다. 아버지, 어버니, 그리고 이제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남자애와 그 아이보다 더 어린 여자아이가 초라하게 앉아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는데, 그 어린 남자 아이의 모습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아이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양반다리를 하고 무릎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옷에, 때가 낀 얼굴..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이의 부모에게 눈이 갔다. 무기력한 모습. 아이의 아버지는 체념한듯이 사람들이 오가는 그 지하보도 한 복판에 팔을 집고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의 부모님과는 완전히 다른 아이의 부모님과 나와는 정반대의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 나는 이리도 좋은 공부환경을 갖추어 놓고도, 오로지 공부만 하면 되는 유복한 상황에 처해서도 내가 내자신을 경멸할만큼 나태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태함을 불가항력적이라고 여기는 나와 이런 나태함조차 느껴볼 수 없을지 모르는 아이. 내가 이토록 힘겹다 여기는 공부가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토록 하고싶어하는 것일지도... 나의 유복한 환경은 생득적인 복이 아니었다. 그들의 희생을 대가로 얻어낸 것이리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하지못하는 것까지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내가 게으른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나에게 바톤을 넘겨준 그들에 대한 기만이자 모욕이었다. 훗날 이들에게 내가 빚진 것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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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고 어느덧 단풍이 익는 가을이 왔다. 고3 때 그랬던 것처럼 수능 100일을 선언하고 나서는 더 시간이 빨리 가는 듯 했다. 흘러가는 시간을 탓하지 않고 지금 이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수능시험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수험생들은 시험의 임박에 다양한 태도를 보인다. 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늘 초조하고 흔들리는 녀석들은 그들이 직면하는 시간마다 자신의 혼신을 다해 착실히 준비하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늘 초지일관으로 공부해온 녀석들의 눈빛은 생기로 넘쳤으며, 여유가 있었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모의고사라지만, 열심히 하는 녀석들은 괜찮은 성적을 받았고, 초조해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지 못한 녀석들은 들쑥날쑥한 성적에 초조함만 더해졌다. 지금 초조해진다면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초조한 마음으로는 제대로된 공부를 할 수 없다. 남아있는 시간만큼은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해 살겠노라 다짐하고 지금까지 못다한 노력을 다 쏟아붇길 바란다. 그래야만 지난 부끄러운 시간들을 덮을 수 있을만큼 '뿌듯한 마음' 충만하게 될 것이며, 시험장에 가기 전에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즈음해서 나는 공부에 피치를 올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10분동안 샤워를 하고 6시 15분경 복된 식사를 감사히 하고, 바로 학원을 가서는 이를 닦고 6시 40분부터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8시 10분 1교시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 1시간 30분정도는 공부할 수 있었다. 1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에 자리에 앉는 학생들도 많았으므로, 나는 누구보다 아침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쉬는 시간은 틈틈히 예습과 복습을 하고, 질문하는데에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가져온 도시락의 딱 반만 먹었다. 그러면 배도 덜 부르고 시간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늘 해오던 영어받아쓰기를 했다. 3시~4시 경에 강의를 마치면 저녁시간 전까지 같은 자리에서 자습을 했고, 저녁시간에는 점심 때 먹다남은 도시락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학원에서 야간자습을 하고 피로함을 조금 느끼게 되었을 때는 고시원에 있는 독서실로 와서 23시 30분까지 공부를 했다. 그까지 하고 나서야 씻고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9월 2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 평가원 모의고사를 학원에서 치렀다. 문제가 약간 어려웠고, 특히 수학은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알쏭달쏭한 문제가 많이 나왔다. 사회탐구 난이도가 조금 높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머지는 평이했다. 그리고 결과는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약 460점 정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어영역과 수리영역이 80점대가 나와서 잠시 기분이 언짢았다가, 틀린 문제를 되집어보고 확인하면서 기분이 편안해졌다. 지난해 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모의고사는 그저 연습일 뿐이라는 자기암시에 나는 어느정도 초연해진 듯했다. 수능을 앞둔 최대의 모의고사인 평가원 모의고사의 결과에 충격을 받기도 들뜨기도 하는 유형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모의고사 결과에 연연하며 들뜨고 충격받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럴 새도 없이 나는 지금 이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얼른 틀린문제를 확인하고 나의 오류를 반성하고는 책을 손에 붙잡아야 했다.
단 한순간도 얼빠진 채로 낭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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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또 흘렀다. 이제 10월도 중반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하루하루 나의 지식이 조금씩 쌓여가고 그에 따라 나의 마음에도 보람이 차곡차곡 쌓였다. 모든것이 지난해와 달랐다. 공부하는 방법이 그랬고, 문자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 그랬고, 시험의 임박에 대응하는 나의 자세도 달랐다. 시험을 생각하면 다소 긴장이 되었지만, 불안함에 책을 소홀히 하는 일은 없었다.
재수를 하면서 유독히 친분을 돈독히 할 수 있었던 친구와도 의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녀석은 늘 열심히 공부했으나, 막판들어 안정치 않은 모의고사 성적에 불안해했다. 주말이면 그 녀석도 함께 식사를 하면서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과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안해하는 그녀석에게 나는 우리는 지금 정말 행복에 겨운 '불안'과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라 일러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지식을 더쌓는 일이라고.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매 순간 온 열정을 다바쳐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해야 한다고 함께 다짐했다. 그녀석도 알고 있는, 모의고사의 무의미함도 함께 마음속에 되새겼다.
11월이 들면서 나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이제 오롯이 혼자가야 할 길만 남아있다 여겼다. 지금부터 대입수능시험 당일까지는 오로지 나의 의지만으로 견뎌내야하는 것이라 여겼다. 여전히 고시원에서 나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일년동안 그래왔듯이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복된 식사를 하고 몸을 풀고는 책상에 앉았다. 오늘 주신 시간을 누구보다 열심히 보내겠다고 다짐하고 6시 30분 경부터 책을 펼쳐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공부는 점심식사를 하는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내가 무심코 지나친 세세한 개념들을 숙지하면서 수학의 정석을 찬찬히 풀어나갔다. 일년간 공부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을 채크해 둔 것이 좀더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수학 공부를 하면서 어느정도 집중력이 올라가면, 언어영역 4~5지문을 풀고 틀린문제는 내가 어떤 사고를 통해 이 답을 도출했으며 그 과정에 어떠한 모순이 있었는지 모조리 적어두었다. 그리고 일년간 틈틈히 만든 언어영역 오답노트를 다시 복습하면서, 당시 나의 추론 과정을 타파하고 정답으로 향하는 논리를 습관화하고자 애썼다. 언어영역이 끝나면 사회탐구 영역중 한과목을을 공부했다. 문제를 풀고 틀린 부분은 교과서를 찾아서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리고 문제 풀이가 끝나면 교과서를 펼쳐서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나갔다. 결벽증이 있는지 몰라도 교과서에 나와 있는 문장 중에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생소한 내용은 무조건 채크해두었었는데 이 부분을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봄으로써 사탐영역의 완벽을 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오전시간이 끝나면 점심식사를 했다. 점심을 먹고나서는 늘 해왔던대로, 고시원 방에서 쉬면서 영어 받아쓰기를 했다. 일년간 점심시간에 해온 영어듣기는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내 영어실력을 뒤쳐지지 않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영어듣기가 끝나면 다시 독서실로 내려와 영어 5지문 정도를 풀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는 다시한번 체크해두었다.
(여기서 이 당시 생활을 모두 열거하자니 힘이 듭니다. 이는 추후에 다시 정리하여 올리도록하겠습니다.)
점심시간 1시간 이후 1시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저녁식사를 하는 6시까지 공부를 했다. 저녁식사를 한시간 동안 하고는 열심히 공부하여 소위 '성공한' 인생 선배들의 저서를 읽으며 지금 나의 생활을 반성하는 자극제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7시 30분경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23시 30분까지 공부를 했다. 이 시기에는 나 자신도 놀라울만큼 하루를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이렇게 공부를 하니 하루 순 공부시간 약 15시간정도 되었다. 이런 생활을 시험치기 전까지 지속했다.
나는 길고도 길었던 수험기간 중에 유독 이 15일이 기억에 남는다. 내 생에 있어서 무언가를 위해 이리도 열심히 살아본 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재수를 하는 1년 내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고 기억할 수 있는 것도 다 마지막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다른 글에서 이미 밝힌 바 있겠지만, 막바지로 갈수록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처음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뒤끝이 약한 사람보다 훨씬 더 결과가 좋을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보람있는 1년을 보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있는 것 같다.
1년간 공부해야하는 고3 및 한번 더 도전하는 재수생과 장수생들까지 이 사실을 명심해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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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수능시험을 치는 2004년 11월 17일이 왔다.
수능 시험은 익숙한 곳에서 치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대구에서 수능 시험을 보았다.
당일 아침, 나는 1년간 해왔던대로 6시에 눈을 떴다. 그리고 속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미역국을 먹었던 것 같다) 따뜻한 국에 밥을 말아먹었다. 시험장까지 부모님이 동행해주셨다. 가까운 곳에 시험장인 경북고등학교가 있었으므로, 부모님과 걸어서 그곳까지 같다. 7시 30분쯤에 경북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시험장앞까지 오면 제법 긴장할만도 한데, 생각보다 담담한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부모님 곁을 벗어나 홀로 시험장으로 떠났다. 그리고 교문을 통과하기전 부모님이 서있는 곳을 돌아보며, 싱긋웃으며 화이팅을 했다. 부모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작년에 시험을 망친 곳에서 나는 다시 시험을 본다. 시험장은 같았지만 지난해와는 모든것이 다르다. 나는 일년동안 성장했고, 사력을 다하지 못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반성하며 내 혼신을 바쳐 지식을 쌓았다.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이름 석자가 적힌 스티커가 책상에 붙어있다. 그리고 내가 가져간 수험표를 책상에 올렸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보았다. 때로는 슬럼프에 빠졌다 합리화하며 보낸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비겁하고 나약한 나 자신을 이겨내기 위해 나 스스로 채찍질한 시간이 더 많았다. 나를 제대로 이기기 위해, 나를 외로운 '아라비아사막'에 가두어 두고자,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나 홀로 나의 24시간을 오로지 나 자신과 투쟁하고자 상경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상황에서 공부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 더이상 후회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만큼 마음껏 공부했고, 이제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지난 일년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수험표 뒷면에 이 말을 정성껏 적었다.
드디어 언어영역이 시작되었다. 90분간의 시간은 정말 금방간다. 언어영역은 특히나 그렇다. 문제가 다소 쉬웠던 것 같다. 지난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작년에는 난이도가 높아 1교시가 끝나자마자 체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밝았다. 수리영역시간에도 그랬다. 어머니가 정성껏 챙겨주신 도시락을 먹으며 시험이 끝날때까지 내가 할 수있는 모든것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시험장을 나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알고있는 모든 것을 다 빼내리라.
영어시험은 상당히 어려워서 거의 대부분 수험생들이 고전한 듯했다.
그리고 사회탐구영역시간. 사회탐구는 4과목으로 각 과목당 30분씩 2시간동안 시험을 치른다. 그런데 사회탐구영역이 시작되고 난 뒤에 수능시험장에서 난관이 찾아왔다. 일년동안 책상에 오래 앉아 생활한 탓에 요통이 극에 달했다. 아침에 허리보호대를 하고 오려다가 오늘은 홀가분하게 시험을 치고 싶어서 풀어놓고 온게 화근이었다. 국사, 근현대사, 경제, 사회문화순으로 시험을 보는데, 국사 시간부터 벌써 통증이 시작되었다. 식은땀이 줄줄흐르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시간만 더 참고 집중하면 된다. 참는다. 참는다...' 이를 악물고 30분씩 버텼다. 그리고 결국에는 정신을 놓지않고 사회탐구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제2외국어를 앞두고 밖에나가서 스트레칭을 했다. 이제 딱 한시간만 버티면 된다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시험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년간의 노력을 단 하루만에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으나,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했노라 나 자신을 위로했다.
시험장 앞에서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나는 웃었다. 하루가 너무 금방지나가버렸다. 그래서 조금은 허탈하기도 했다. 겨우 이 하루를 위해, 내가 그동안 참아왔는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삶을 오로지 나 스스로 계획하고 일년을 보냈다.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나, 이제는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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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조심스레 답을 확인했다.
늘 나를 걱정시킨 언어영역의 답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오답노트를 활용한 공부방법이 틀리지 않았는가보다. 100점. 수리영역도 채점했다. 또 100점. 여기까지 채점하고 나자 왠지 만점 받을거 같았다. 괜한 기대;;.. 영어는 94점이었다. 그리고 허리가 아파서 고생이 심했던 사회탐구는 조금 더했다. 사회탐구시간 시간이 갈 수록 요통이 더욱 심해지듯이 국사, 근현대사, 경제, 사회문화로 갈수록 조금씩 더 틀리는게 웃겼다. 국사 50, 근현대사 47, 경제 47, 사회문화 44... 일본어 만점.. 총점 482점이었다. 기대한 것(만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참고로 어머니께서는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오늘 저녀석이 일내겠구나'생각하셨단다. 후후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 편안함이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나타나나 보다. 수능 성적을 기다리며 이제 더 치열한 논술과 면접을 준비해야 했다.
아.. 그리고 재수 막바지에 불안감과 초조함으로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던 그 친구도 결국에는 성적을 잘 받았다.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다. 기뻤다. 함께 동고동락한 동지가 잘되는 일이 이리 기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것도 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초조했던 고3시절 경쟁자였던 친구들을 늘 경계했던 초라한 내 모습도 씻은 듯 없어졌다. 나는 그 친구에게 잘되었노라.. 해낼줄 알았노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좀더 희소식은 7차교육과정이 내 수능성적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사회탐구의 비중이 줄어들고 국어수학영어의 비중이 대폭 증가한 7차 대학 입시에서 나의 수능점수는 그야말로 막강한 것이었다. 나는 전체에서 사회탐구에서 깎인 점수가 12점에 달했는데 국어수학영어에서 12점 깎인 내 점수대의 수험생보다 만배는 유리했던것 같다.
지난해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지원하고자 마음을 굳혔다. 내가 선택해서 온길, 더이상 미련은 없고, 후회 또한 남기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 재수학원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논술학원에서 논술강의를 들었다.
우리나라 사교육시장에서 나는 논술강의 시장처럼 가격이 높게 책정된 시장을 본적이 없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백만원은 예삿돈이다. 학원에 가봤자 크게 달라지는게 없을텐데도 이 기간이 되면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모든 수험생들도 '어쩔 수 없이' 학원을 다니게 된다. 불안하니까. 지금생각해보면 학원을 다녀서 내 글실력이 늘었다기보다는, 내가 나의 글을 분석하고 잘된 글을 분석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향상된 실력이 내 글솜씨의 대부분인것 같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나의 글솜씨의 약점을 알고 타 작가의 장점을 수용하면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여튼 나는 대치동 어느 구석진 꾸지리한 고시원에 새로운 터를 잡고 논술을 쓰러 학원에 다녔다.
다른 이야기를 또 하자면, 논리적인 글쓰기는 어딜가든 써먹을 데가 많은 듯하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내가 논술을 준비하기 위해 고시원 골방에서 그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제대로된 레포트를 단 한편도 써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만큼 대학에서 요구하는 글실력은 꽤나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걱정하지마시라. 글은 정말 쓸 때마다 조금씩 나아진다.
12월이 되어서 성적표가 나왔다. 표준점수와 원점수를 비교해보니 영어가 2점 높게 나와 총점 484점이 되었다. 그리고 원점수 제도가 없어졌으므로, 표준점수로 대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성적표에는 어느 구석을 보아도 원점수는 나와있지 않았다. 백분위와 표준점수 뿐이었다. 내가 선택한 사회탐구 과목이 조금 어려웠는지 다른 사탐 과목 만점에 해당하는 표준점수보다 더 높은 점수가 나왔다.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실로 나의 표준점수는 '무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성적표를 찾으로 모교 행정실을 찾았을때, 교장선생님이 나와서 나를 반겨주셨다.
(자꾸 글이 이상하게 삼천포로 빠지네요. 워낙 하고싶은말이 많아서..)
1월 중순까지 나의 논술공부는 계속되었고, 드디어 논술을 치르게 되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3시간동안 2500자 내외의 글을 써야만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늘 연습해왔던대로 나는 차분하게 제시문을 읽고 나의 주장을 정리했다. 일사천리로 2500자 내외의 글을 쓰고나니 10여분정도 시간이 남았다. 희망적인 결과였다.
논술 다음날에는 면접을 보았다. 지난해에 3명의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분들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면접장을 빠져나와야했다. 하지만 올해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모르는 부분도 당당하게 내 나름의 추리를 했고, 교수님들께 자신있게 대답했다. 교수님들은 웃으셨다. 학교에 들어오면 영어공부에 늘 힘써달란다. 나오는 발걸음도 지난해와는 다르게 가벼웠다.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었다. 합격이 예상되었다. 자신있었다. 나 스스로에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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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되어 드디어 합격자를 발표했다. 예정된 기일보다 하루 이른 저녁에 SMS를 통해 합격자 발표를 통보받았다. 웃기게도 나는 태평스럽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한참 꿀맛같은 낮잠에 빠져있을 때, 휴대전화기 진동을 느꼈다. 잠결에 확인했다. 'XXX님.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최종 합격. 축하합니다.' 그리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담담했다. 뛸듯이 기쁘지도 않았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좋지않은 결과를 받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어버지께 합격 소식을 알려드렸다. 지난해 다 자란 손자의 실패담긴 눈물을 위로해주셨던 나의 조부는 이번 합격에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하해주셨다. 부모님께도 이 사실을 알렸다. 두분다 이미 합격자 발표를 본 상태였으나, 나의 전화를 세상에서 가장 기쁜 사람처럼 받아주셨다. 우리 가족이 없었더라면 나는 마음껏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책상에 조용히 앉아 이들의 뒷바라지에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인터넷을 통해 합격통지서와 등록금 고지서를 출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등록금 고지서에 내야할 등록금이 '0원'으로 찍혀있었다. 나는 성적우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200만원이 넘는 입학등록금을 전액 지원받을 수 있는 영광된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입학인원의 2%내외, 다시 말해 경영대학 입학생중 상위 2~3명에게만 주어지는 성적우수 등록금 전액면제 장학생에 내가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최고의 학과에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게 된 것이다. 나약한 자아를 타파하고자 노력한 지난 일년이 빛나는 듯 했다. 그리고 무슨일이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다시한번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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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년 훌쩍 지나버린 일이 되어버렸으나 지금보다 어렸던 시일 극기복례를 외치며 공부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뿌듯하다. 게을러지려고 할 때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회의가 느껴질 때, 지난 날을 떠올리면 자신감이 샘솟는다. 이제 보잘것없는 나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어떤 이들은 나의 경험에 콧방귀 뀔 수도 있겠으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누군가는 내 경험에서 도움을 발견하지 않을까하여 드문드문 글로 남겨보았다.
21세기가 되면서 '열심히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 결과가 좋고 잘하면 된다. 하지만, '제대로된 방법'으로 '과정'에 충실할 때에 결과도 좋아진다는 내 신조는 변함이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나, 지금 이순간을 진정으로 '즐길줄'아는 이들이 드문것 같다. 즐긴다는 것은 논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나의 온몸을 맡기고, 정신과 육체가 하나를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다.
산에 오르는 일을 떠올리면 더 자명해진다. 등산을 할때에 내가 가야할 정상을 보면서 산을 오르면, (투쟁심에 불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아직도 갈길이 많이 남았음에 숨이 턱턱막히고, 포기하고픈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보다 가파른 오르막을 만났을 때 꼭대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발 아래, 내 주위에 놓여있는 것에 집중해보라. 내가 지나치는 나뭇가지의 너울대는 춤사위를 눈으로 확인하고 내가 밟는 잡초의 생명력 넘치는 울부짖음을 귀로 들으며, 흙이 내뿜는 뜨거운 숨결을 느껴보라. 나는 어느새 그 가파른 오르막의 꼭대기에 올라 뿌듯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지금 해야하는 일은 정상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일이 아니라, 가야할 곳을 잊지않고 내가 직면하는 순간과 상황에 내 온 정신과 육신을 쏟아붓는 일이다. 그러면 어느순간 나도 모르게 어느 경지에 올라 정상에 점점 다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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